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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물리(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

가꾸시는 매화 분(盆)은 피었다 졌겠어요

흉내 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

꽃봉오리가 날로 번져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

행사(行事) 삼아 돌을 하나 옮겼습니다

돌 아래, 그늘 자리의 섭섭함을 보았고

새로 앉은 자리의 청빈한 배부름을 보아두었습니다

책상머리에서는 글자 대신

손바닥을 폅니다

뒤집어보기도 합니다

마디와 마디들이 이제 제법 고문(古文)입니다

이럴 땐 눈도 좀 감았다 떠야 합니다

이만하면 안부는 괜찮습니다 다만

오도카니 앉아 있기 일쑵니다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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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절

2011. 12. 12  강화읍

호시절

그때는 좋았다
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국부를 이루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뜻했다
그때는 좋았다
사소한 감탄에도 은빛 구두점이 찍혔고
엉터리 비유도 운율의 비단옷을 걸쳤다
오로지 말과 말로 빚은
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
난쟁이의 호기심처럼 반짝이는 별빛
왕관인 척 둥글게 잠든 고양이
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
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
그때는 좋았다
격렬한 낮은 기어이
평화로운 밤으로 이어졌고
산산이 부서진 미래의 조각들이
오늘의 탑을 높이높이 쌓아 올렸다
그때는 좋았다
잠이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이 사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
고이 감겨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심보선/눈앞에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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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자신이 스스로 무슨 뜻의 말을 하는 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이를테면 .... '나는 소설을 안읽어!' - 인간으로 태어나 그 큰 뇌를 먹여살리면서도 문학의 세례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걸 이다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그대의 무신경에 경배를...
'도대체 시를 어떻게 읽어?' - 이런건 대부분 우리의 한심한 문학교육 책임일터....

인수봉에 미쳐 돌아다니던 젊은 시절에 (그때는 왜 그리 뜨거웠을까?) 암벽기술과 파이프담배피던 겉멋뿐 아니라 인수봉에서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을수 있으려면 시를 읽을줄 알아야한다며 '황동규'를 알려준 혁이형이 없었다면 저도 먼 길을 돌고있겠지요.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시를 읽지 못하거나 술자리에서 시한줄 외우지 못하면 부끄러웠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시절에는... 돈많은 부모덕에 자가용을 타고 다니던 애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맥주양주 마신다고 뻐기지 못했으며.... 오늘을 팔아 내일을 사거나 막막한 마음에 복권을 사는 일이 드물었던 그시절... 이게 바로 '오래된 미래'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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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 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 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 권혁웅「황금나무 아래서」문학세계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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