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사진전 - 네여자











전시일정

■ 전 시 제 목:   네여자 展

■ 전 시 작 가:   최영진

■ 전 시 일 정:   2009년 04월 29일(수) ~2009년 05월 12일(화)

■ 초 대 일 정:   2009년 04월 29일(수) 저녁 6시

■ 전 시 장 소:   사진전문갤러리  "gallery NoW"





작가노트


길게, 수평으로 늘어진 시간은 나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정밀한 규칙을 갖고 흐른다.
나의 생명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작해 지금 40대 중반까지 호흡을 멈추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어린시절 기억이라곤 낡고 희미해져버린 조작된 기억 몇 조각밖에 없다. 그것들로 지금 내 존재를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20대에 어떤 분의 소개로 한 살 아래의 여자와 만나, 결혼을 약속할 겨를도 없이 밤을 뜨겁게 보냈다. 그러던 중 여자는 첫 아이를 잉태했다. 다섯 달이 지난 후 웨딩드레스 긴 치맛자락에 아이의 존재를 숨긴 채 많은 하객들 앞에서 축하를 듬뿍 받으면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뱃속 아이에게까지 느끼지 못하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식구는 둘에서 셋, 넷, 다섯으로 늘어났다. 집안 구석구석은 방긋방긋, 까르르, 하하하, 응애응애, 엉엉 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둘만의 삐걱삐걱 쿵쾅거림마저 아이들의 소리에 녹아버리고, 밝은 빛과 아름다운 향기와 평화로 충만해졌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 속에 나의 외모와 사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닮은 것처럼...
사십년 전 나의 모습을 아이들이 재생시켜줄 때 짜릿한 감동과 사랑의 감정이 나 자신을 증명해준다는 걸 비로서 알게 되었다.

- 최영진 작가노트





서문

삶의 진실과 기억의 레미니센스


우리가 순수예술(Fine art)이라고 규정하는 조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경험담을 쓰듯이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우가 투영되는 일종의 자기 반영(自己 反映)이다. 이럴 경우 이미지는 멀리 산 위에 피어나는 연기와 같이 적어도 어떤 원인적인 것에 의해 야기되는 신호(index)로 간주되는데, 이 신호는 결과로 나타난 이미지는 반드시 그것을 있게 한 실행자의 발생적인 동기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것은 근본적으로 발생적인 동기로서 자기 반영을 물질화시키는 행위로 이해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존재하게 하는 최초 발생적인 감정 즉 생성(gen?se)이다. 이 감정은 문화적 영역에서 이해되는 앎(상징이나 코드)의 차원이 아니라 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은밀히 야기되는 감성적 차원이다.

예컨대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듯이, 내면에서 생성되는 순수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응수는 전혀 논리적 근거를 달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두께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일종의 감성적인 메아리가 된다. 거기에는 대상과 기억 사이에서 발생되는 감성의 공명(共鳴)만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단순히 장면의 순간 포착이 아니라 초 이하의 극히 짧은 촬영 순간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적어도 촬영자의 의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 작가 최영진의 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삶의 메아리로서 작가의 경험적인 침전물이다. 사실상 금방이라도 아이들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욕실에서 아이들과 목욕하는 아내 그리고 수라장이 된 욕실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한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단번에 가족의 단란함, 일상의 여유, 삶의 행복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의미론적 문맥을 생각하게 하고, 게다가 스냅사진의 형태로 나타난 전형적인 가족 이미지는 더욱 더 이러한 선입견을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촬영자의 근본적인 의도는 삶과 일상 그리고 가족과 행복 근처에서 소통되는 문화적 코드가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 반영으로서 어렴풋한 자신의 기억과 혼재된 삶의 느낌을 드러내는 사진적 행위(acte photographique)이다. 작가는 "문득 아이들이 점점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속에 나의 외모와 사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고, 마치 나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닮았듯이 (...) 사십 년 전 나의 모습을 아이들이 재생시켜주고 짜릿한 감동과 사랑에 대한 감정이 나 자신을 증명해준다"라고 진술하듯이, 작가가 실질적인 촬영한 것은 모델로서 아이들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야기된 기억의 레미니센스(r?miniscence)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리고 가족의 새로운 영역과 삶의 애환을 경험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기억의 레미니센스는 어떤 감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음색(tonalit?)인데 언제나 불확실하고 몽롱한 장면으로 나타난다. 사실상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연상(聯想)은 사물이 사물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기억하는 배경으로서 기억의 틀(cadres de la m?moire)에 각인된 것, 다시 말해 그 사물이 끌고 있는 당시 상황적인 음색이나 인상을 호출하는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삶의 쉼터에서 무심코 느끼는 레미니센스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애석한 느낌을 동반하고 있다. 그래서 레미니센스는 “예전의 음색으로 어린 시절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때 어른의 시각으로 다소 가식적이고 미화된 환영(illusion)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사실상 서로 다른 두 기억 틀의 불연속에서 야기되는데, 왜냐하면 어른의 틀은 아주 견고하게 짜여 진 사회적 틀인 반면, 어린 시절의 틀은 독립되고 이질적이고 붕괴된 틀을 갖기 때문이다.”(모리스 알바쉬)

이러한 레미니센스는 흔히 현실의 경험적인 상황 속에 투영되면서 삶의 단편으로 위장된 일종의 은폐-기억(souvenir-?cran)으로 이해된다. 굳이 말하자면 작가에 의해 촬영된 장면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일상의 구체적인 아이들의 모습들로 위장되어 있지만, 정작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은 오래 전에 억압되고 망각된 그러나 줄 곧 그를 따라다니는 환상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렴풋한 레미니센스 그리고 이제 이 아이들이 ... 이와 같이 위장된 심리적 은폐를 작품의 진행과정에서 “전이(轉移)”라고 하는데, 전이는 주체의 무의식적인 억압이나 욕구를 특정한 대상이나 장면으로 대치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의심할 바 없이 사진적 행위는 바로 이러한 심리적 전이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젊음도 꿈도 용기도 사랑도 정렬도 모두 사라진다. 망각과 포기가 점령하는 삶의 종착점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시간에게 내 주어야 한다. 삶의 긴 여정에서 어느 날 작가가 뒤로 힐 끗 본 것은 성공의 기쁨, 축복된 만남, 사랑의 열정, 미래의 희망 등 지난날의 즐거움으로서 기억이 아니라  대부분 이루지 못한 애착과 만신창이가 된 육신 그리고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욕망으로서 망각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거슬러 싸우는 치열한 전투 속에 메두사(Medusa)의 머리와 같이 시간을 정지시키는 특별한 마술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마술이 보여주는 시간의 흔적은 기억의 병력구술이 아니라  망각의 레미니센스일 뿐이다.

결국 작가의 가족사진은 단순한 상황 진술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삶의 진실을 은밀히 들추어내는 흔적으로서 혹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의 반사적인 지표로서, 작가 자신의 발생적인 감정을 대체하는 무의식적인 전이물이 된다. 작품이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것은 작가의 체험이 투영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진실 즉 인생의 끝없는 굴곡을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침전되는 사랑, 욕구, 애착, 아쉬움 등과 같이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삶의 앙금들이다. 바로 여기에 사진예술의 진정한 메시지가 존재할 것이다.

이경률 (사진 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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