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는 이제 그만! - 보은 고속도로 개통기념 대회

금요일 저녁에 늘그막에 옛날 애인 만나 갑자기 결혼하기로 했다는 스튜디오70 형님 소식에 대취한 탓에 컨디션 조절은 커녕 토요일 퇴근 때까지 술이 깨질 안는다. 젠장알! 자알하는 짓이다. 게다가 핸드폰까지 흘리고 왔다.
그래도 대회전날이니 아끼고 아끼던 튜블러 타이어로 타이어를 교체했다. 한짝에 거금 10만원을 주고 산 튜블러-클런쳐 투포 타이어. 지난 8월 대관령 업힐 대회때 사용하곤 고이 접어서 보관해왔다. 그래도 대회참가하는 데 평소 자출하는 생활자전거 모양을 하고 나갈 수는 없어서 큼지막한 앞등을 떼고 번쩍번쩍 뒷등도 떼고 공구하고 예비튜브가 들어있는 안장가방, 펌프를 떼니 이제사 레이싱 자전거의 모양새가 난다.
시험치는 전날 처럼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못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버스를 타기로 한 장소로 달려가니 놀랍게도 내가 젤로 좋아하는 가수 김창완아저씨가 탄다.(김창완씨는 54년생이니 나랑 띠동갑이이지만 왠지 꼭 아저씨라고 불러할것 같다.) 버스에 자리를 마련해주신 아르곤님하고 같은 팀이였나보다.
버스에서 졸다깨다를 반복하는 데 아름다운 안개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8시쯤 도착한 대회장소는 아직 공사가 마무리가 안된 창원-보은-상주간 고속도로. 고속도로 개통기념으로 개통전에 자전거 대회를 연다고 하여 일생에 고속도로를 자전거로 달려볼 기회가 있을까 하여 별 생각없이 참가 신청을 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들여다 보니 고속도로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상의 모든 길 중에서 제일 배타적인 길이 아니던가? 수천년 대대로 내려오는 마을을 가르고 산을 뚫고 강을 지나 오로지 속도만을 추구하는 길. 토목공학의 놀라운 성과는 대관령, 미시령등 어떠한 고개도 용서없이 관통당했고 어떤 강과도 함께 흐르지 않는다. 오직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를 추구할뿐. 게다가 이 길은 자전거, 우마차, 사람, 동물은 커녕 우리나라에서는 오토바이조차 출입이 금지된 금단의 길이 아닌가? 미친듯이 달리고 달려 어디에가는 지도 모르면서 바쁘게 달아나야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이 놀라운 석유문명의 산 증거 고속도로에서.... 느림의 아름다움을 배워 폭주하는 자동차를 조금이라도 멀리하여 조금이라도 지구를 지켜보겠다고 시작한 자전거를 타고 혐오스러운 고속도로를 달리는 대회에 나오다니 도대체 아무 생각도 없었던거다.
더군다나 번호표를 보니 후원자가 이름도 거룩한 '아우디'와 '폭스바겐'이라니... 더더욱 마음이 참담해진다. 이 대회는 나날이 커져가는 자전거족들의 반란이 두려운 자동차족들과 건설토목족들의 달콤한 설탕발림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대회가 시작되니 폭스바겐과 아우디가 선두를 끌어주는 친절까지 베푼다. 아우디가 '자전거녀석들아 너희들이 이 길을 달리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고맙게 느껴보도록 해라.' 하면서 비웃고 있는 것같다.
고속도로 개통후에는 석유가 바닥을 들어내 자동차가 멈추는 그날까지 이 길이 자전거와 보행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이 없을 테니 이번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게 이유인지 대회 진행이 말도 못하게 성의가 없다. 속도가 느린 MTB를 싸이클에 앞서서 출발 시켜 사고 위험을 높이고 예정보다 2시간 넘게 기다리게 하고.... 어쩌랴 아무 생각없이 자동차족의 미끼를 덮석 문 값을 치르는 수밖에.
드디어 맨 마지막 출발. 싸이클 시니어. 마흔이 넘으니 자전거 대회에선 연장자 대접을 해주니 고맙다. 적어도 뒤에서 출발한 젊은이들에 추월당하는 수모를 겪지는 않을테니. 죽어라 선두 펠로톤에 들어가 그룹라이딩을 해야 상위권진입을 바라볼 테지만 한번 엇나간 마음은 다른 라이더들과 죽어라 경쟁하며 달리기 싫어진다. 무슨 경사가 났다고 죽음의 길에서 잔치를 벌이랴! 마침 서로 도와가며 달리자는 선배가 있어 함께 끌어주기로 한다.
자동차 선도구간을 지나 선배와 교대로 바람막이를 하다 30분쯤 지나니 선배가 뒤로 쳐졌는지 힘들다고 앞으로 나오라고 사인을 보내도 반응이 없다. 할 수 없이 이때부터 혼자서 달린다. 경쾌한 타이어소리, 최대심박수를 향해 고동치는 심장, 거친 숨소리 밖에 들리는 게 없다. 맞바람이 거세면 핸들바에 고개를 처박고 달리기를 계속한다. 나의 젖산역치 파워인 285와트의 바로 아래 파워로 페이스 조절을 하기로 했는데 의외로 힘이 더난다. 새 타이어 탔일까?
한참을 혼자서 달리니 힘들고 외롭다. 잠시라도 다른 사람을 앞세우고 페달질을 쉬고 싶다. 그러자면 짝을 찾는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앞에서 달리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한다. 우선 엉덩이와 허벅지의 모습과 움직임이 들어온다. 탄탄한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으면 적합하지 않은 상대다. 우습게도 입고 있는 옷과 자전거도 감별사항이고 이미 페달질이 현저하게 느린 사람도 안된다. 몇몇을 추월하였지만 맘에 드는 사람들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다 제법 씽씽한 상대를 만났다. 물론 얼굴도 모르고 이름은 더더욱 모른다. 길에서 처음 만난 사이이니 내가 아는 건 탄탄한 엉덩이와 빠른 페달링을 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맘에 든다고 무조건 뒤에 붙어서 따라가는 건 커다란 실례다.(당신 같으면 엉덩이가 맘에 든다고 무작정 뒤에 붙는 녀석이 좋겠는가?^^) 여자를 만났을 때도 무조건 들이대는 전략은 석기시대와 함께 폐기된 방법이라고 배웠으니 조류이상의 고등동물들은 세련된 방법으로 짝짓기 춤을 춘다. (물론 가끔은 솔찍하게 같이 끌어줄까요?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의 짝짓기 춤은 이러하다.
일단 살짝 뒤에 붙어서 따라가다 상대의 속도가 줄면 자연스레 앞으로 나가서 바람 막이를 해준다. 짝지을 마음이 있는 상대라면 모르는 척 뒤에서 따라오다 내 속도가 줄면 다시 앞으로 나와준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상대가 점점 내 앞으로 나오는 시간이 줄어들며 나만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미련없이 버리고 앞으로 달린다. 단물쓴물 다맛본 부부라면 참으며 살 수도 겠지만 '원나잇 스탠드'보다 더 짧은 길위의 관계에선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난다. 쫓아올테면 쫓아와!!! 몇명을 버리고 떠나다 나도 맘에 드는 젊은 엉덩이와 짝지은지 10분만에 버림을 받았다. ㅠ.ㅠ 하지만 속상해 할 필요는 없다. 싱싱한 엉덩이는 많을테니....
달리다보니 클럽 연장자들을 모두 추월하고(죄송합니다. 마린보이님!^^) 나보다 앞에서 출발한 김창완씨가 노란 져지를 입고 앞에서 달리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아침에 버스 같이 타고 왔어요. 잘 타시네요. 헉헉"
"어! 그래! 헉헉"
"요새도 자출 하세요? 헉헉"
"그럼, 서초에서 목동까지 20km야, 헉헉"
"저는 목동에서 강화까지 자출해요. 헉헉"
"결승이 다가오니 페이스를 올려볼까요? 헉헉"
"오케이"
"아이고, 너무 빨라. 먼저 가!"
"네! 이따가 버스에서 뵈요!"
둘이서 짝지어 가다 앞에서 달리는 세사람과 함께 달려 다섯명이 되지만 맨앞사람이 뒤로 빠지면 맨 뒷사람이 앞으로 나오는 식으로 교대로 선두를 지켜주는 매너있는 엉덩이들이 아니다. 나만 계속 맨앞과 두번째를 왔다갔다하는 수모를 당한다. 하지만 이들을 뒤에 남기고 도망갈 에너지가 없으니 참고 달리는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의 경쟁상대는 이들이 아니고 내 자신이 아니던가? 잠시도 여유가 없지만 틈날때마다 물을 마시고 20분 마다 파워젤을 먹어줘야한다.
속도계를 보니 65km가 가까워진다. 출발할 때 75km라고 했으니 마지막 아껴둔 힘을 내려고 하는 데 갑자기 피니쉬라인이 보인다. 내 뒤에서 달리던 몇몇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결승선을 지난다. 시계를 보니 아슬아슬하게 두시간이 넘은 기록.
대회를 끝내고나니 일등을 하지 못한것은 아깝지 않지만 다리에 힘이 남아있는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다. 이런 젝일! 처음부터 맘에 안들더니 끝까지 약올리는 자동차족들이군! 전체 거리를 10km나 잘못 알려주다니...
@ 총정리
1. 65km, 2시간 1분 58초
2. 평속 31.8km
3. 평균심박수 168회, 평균 파워 269와트, 1928Kcal소모
@ 아래의 연속 사진은 그날 있었던 결승점 사고 장면입니다. 막판에 거대한 그룹(펠로톤이라고 합니다)이 맹렬한 속도로 결승선으로 돌진하는데 (속도가 60-70km) 아차하는 접촉이 있으면 이런 엄청난 사고가 날 수 있답니다.
물론 저처럼 혼자서 떨어져 독주하는 사람은 1등은 못해도 사고는 안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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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 2007/10/10 12:03
- Category:
- b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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