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식사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 내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시선) 19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19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려뜨렸는지. 취중 난동은 자해 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신형철산문집 느낌의 공동체에서 발췌)

이런 시인이 있답니다. 두피에는 혈관이 풍부해서 다치면 무척 피가 심하게 나는데 같이 술마시면 주사때문에 걱정스럽긴 하겠네요.^^ 책날개에 있는 사진을 보니 심지어 이쁘기까지 합니다. 요즈음 요리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뒤적이며 지내고 있는데 그녀의 시집을 읽다가 이 시가 눈에 밟히네요.






깨끗한 식사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시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못을 끌고 어디까지!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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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것과 내 것이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의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 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사라지리라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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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함과 부드러움의 경계

무한질주와 느림의 경계

길과 길 아님의 경계

짐승과 사람의 경계

물질과 생명의 경계


나와 너 사이의 경계


갓길을 달리는 것은 그 경계를 달리며 경계를 허무는 것

가녀린 호박넝쿨이 작은 손을 내밀어 응원을 보내고 있다.


결코 건널 수 없을 거 같은 그 경계에도 작은 틈이 생겨 무너지고 무너져 결국엔 하나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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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김포 마송지구, 올림푸스 1030sw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잊었는가 바벨탑
보라 한 건물을 쌓아 올린 언어의 벽돌
만리장성, 파리 크라상, 던킨 도너츠
차이코프스키, 노바다야끼......
기와불사 하듯 세계 도처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이진법 언어로 이룩된
컴퓨터 데스크탑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
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
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
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김포평야 물 괸 논에 아파트 그림자 빼곡하다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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