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분분하다

 안 가 본 나라엘 가 보면 행복하다지만, 많이 보는 만큼 인생은 난분분(亂紛紛)할 뿐이다. 보고 싶다는 열망은 얼마나 또 굴욕인가. 굴욕은 또 얼마나 지독한 병변인가. 내것도 아닌 걸, 언젠가는 도려내야 할 텐데. 보려고 하지 말라. 보려고 하지 말라. 넘어져 있는 부처의 얼굴을 꼭 보고 말아야 하나. 제발 지워지고 묻혀진 건 그냥 놔두라.

  가장 많이 본 사람은 가장 불행하다. 내 앞에 있는 것만 보는 것도 단내 나는 일인데. 땅속에 있는 전설을 보는 자들은 무모하다. 눈으로 보아서 범하는 병.

  끌려 나온 물고기가 눈이 튀어나온다.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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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리다

슬픈 빙하시대1


  당신을 알았고, 먼지처럼 들이마셨고

산 색깔이 변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속에 없었기에 내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손짓해도, 목이 쉬게 외져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는 길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닦아 놓았을 그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신의 슬픔이겠지요.

  호명되지 않는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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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머뭇거렸다
늘 한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언제나 아프게만 했다

늘 미안하기만 하다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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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흉국인


상상동물 이야기 15

- 관흉국인(貫胸國人)


해외(海外)의 동남쪽에 관흉국이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귀한 사람을 모셔 갈 때, 앞뒤에 선 사람들이 긴 장대를 가슴에 꽂고 그걸로 귀인을 꿰어 간다

상처 받은 사람을 곧장 떠올린다면
당신도 한때는 관흉국에 살았다
그 사람이 오래된 타일처럼 떨어져 나갔다
대신에 그곳을 바람이 들고 난다

(권혁웅,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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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를 떠올렸다면 당신도 많이 아팠구나
가끔씩 찾아오는 가슴 언저리의 뻐근한 느낌
끊어진 줄이 바람에 흔들리며 상처를 덧내고 있어
그래 상처가 큰 건 잘못이 아니야
큰 상처에 큰 흉터
그래야 그대를 기억속에 가둘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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