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둥이




상상동물 이야기 17

-케르베로스


  머리 셋 달린 사나운 개가 저승 문을 지키고 있다 망자가 저승에 이르면 케르베로스는 뱀 대가리가 붙은 꼬리를 치며 망자를 반긴다 하지만 그가 저승 문을 나서려 들면 케르베로스는 세 개의 입으로 으르렁거린다

  오늘도 도로 위엔
  머리만 남은 개 가죽들이 솟아난다

  당신은 시속 백 킬로의 삶을 늦출 수 없다 당신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니 그냥 개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 이르든, 목적지에선 이미 케르베로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권혁웅,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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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 현기증나는 속도에서 내려설 수 있을까?
느리게 걸으며 사뿐히 걸어가는 고양이를 쳐다볼 수 있을까?
오늘도 내일도 죽을만큼 달리고 달린다
*흰둥이 : 몇달간 자출길에서 만나야했던 개, 지나가면서 오늘도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부탁했다. 흰둥이는 도로에서 죽어서 가죽을 몇달간 남겼다. 나도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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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

얼레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을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김선우,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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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한 번의 낮과 밤

마흔한 번의 낮과 밤


계속해야 한다.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할 것이다.
- 베케트

 
  이를테면 심장 근처에도 약음기(弱音器)라는 게 있어서 떨리는 줄을 지그시 누를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다른 선(線)이 공명을 부를 터이니 이 문장이 다른 문장과 만나 조용히 어두워지면 좋겠다 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내가 디딘 계단은 무채색의 반음계여도 좋겠다 그가 내려올까 말까 망설일 때 내가 이 못갖춘마디를 먼저 올라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줄에 걸린 심장의 두근거림이 천천히 잦아 든다면, 그게 어두워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눈을 감는 것이라면

(권혁웅,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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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의 감각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무심히 지나치던 엉겅퀴의 가시가 가슴을 저며온다
아! 그대 또 오셨는가?
익숙했으나 한때 잊혀졌던 열병
심계항진, 이상발한, 깊은한숨, 잠들수도 취할 수도 없는 밤
그대 가슴과 내 가슴에 공명하던 선이 끊어졌으니 이 떨림은 어디로 흐를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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