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경 합시다

태어나면 꼭 한번은 죽어야하는 인생이니까 어떤걸로 죽을까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얼마전에 미국의 로드 싸이클 황제 암스트롱의 책을 읽어보니('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암스트롱이 고환암을 진단받았을 때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25살 꽃다운 나이, 잘나가던 싸이클 선수가 고환암이 걸렸고 게다가 폐하고 뇌까지 전이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의붓아버지한테 구타를 당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그에게 자전거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책에서 그가 꿈꾼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백 살쯤 되어 죽고 싶었다. 등에는 성조기를 달고 헬멧에는 텍사스의 별을 달고서, 사이클 위에서 소리를 지르며 시속 120킬로미터의 속도로 알프스 산맥의 내리막을 달려 내려온 후에 말이다. 그리고 멋진 아내와 열 명쯤 되는 내 아이들의 환호를 받으며 결승점을 통과하고는, 프랑스의 그 유명한 해바라기 밭에 누워 우아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암스트롱은 고환암 말기에서 기적으로 생환하고 '뚜르 드 프랑스'을 7연속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들 대다수는 암으로 죽게 됩니다.(5명중에 3명은 암, 1명은 심장-뇌혈관계,1명은 교통사고 정도일겁니다.) 더군다나 말기암 진단받고 완치되는 경우는 아주 특수한 경우죠.(혈액암이나 임파종, 고환암등 몇몇만 가능) 그러니까 예방 및 조기 진단이 중요한거죠. 적절한 운동, 체중 감량, 금연, 금주, 스트레스 줄이고 ..... 등등 암을 예방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그다음에 가능한 것은 정기적인 검사로 조기 진단 받는 게 차선책입니다.

누구나 암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겠지만 유난히 암이 많은 가족력을 가지고 있는 저는 더더욱 그러합니다.(할아버지-직장암, 할머니-위암,큰아버지-위암, 큰모고-위암, 아버지-췌장암) 하지만 그동안 내시경을 단 한번도 안하고 버텼습니다. 젊을 때는 안아파서 안했고 마흔살이 넘어서는 무서워 버디타가 스스로에게 선물로 내시경을 주기로 결심하여 얼마전에 드디어 내시경을 했습니다.

요새는 새로운 약물이 나와 '의식하 진정 내시경'(흔히 수면내시경)이 발달되어 고통스럽지 않게 할 수 있지만 안하고 버티는 이유는 검사 과정도 과정이지만 그 전후에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더욱 멀리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저는 삶의 체험 현장 답게 '쌩으로' 내시경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루에 대장내시경과 위내시경을 한꺼번에 할 때는 대개 먼저 대장내시경을 합니다. 위내시경은 아침 금식만 하면 할 수 있지만 대장내시경은 곱창을 청소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을 청소하는 약물을 마셔야 합니다. 보통 2리터에서 4리터를 마시는데 이게 꽤 괴롭더군요. 맛도 이상한데다가 맥주도 아닌 것을 이렇게 마셔본 적이 없으니.... 꾸역꾸역 3리터쯤 마시니 설사가 제법 맑게 나와서 대장내시경을 시작했습니다.

위내시경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고 생긴모양도 비슷해서 그리 어렵지 않지만 대장내시경은 대장의 길이도 길고 해부학적으로 꼬불꼬불한 정도가 개인차가 많이 나기때문에 힘든 경우에는 아주 고생을 합니다.(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저도 약간 힘든 경우였는지(아니면 내시경해준 원장이 억하심정이 있었던지 모르겠지만) 너무 힘들어서 거의 죽는줄 알았습니다. 장이 꼬였다가 풀어지는 대목에서 아랫배를 후비는데 마치 에어리언이 뱃속에서 요동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중간에 포기하고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고 말할 뻔 했겠습니까?ㅠ.ㅠ

대장내시경을 마치고 위내시경을 하는데 이건.....  목을 넘어갈때는 엉겁결에 넘겼는데 저는 목의 '구개반사'가 예민한지 계속 구역질이 나오는데 구역질이 가볍게 '웩웩'거리는 게 아니라 저 깊은 곳에서 완전히 속이 뒤집어져 나오는 데 '우웨웨웨엑~~~~' 하고 나오더군요. 이거 몇번 더 하다가는 위-식도 부위가 찢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역질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더군요. 하지만 도저히 의지력으로는 참을 수 없는 게 '반사작용'이니 어쩌겠어요?

다행이 검사가 정상으로 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고나서 고생하는 환자들의 심정을 잘 알겠더군요. 그리고 얼마나 마음이 개운한지 모르겠어요. 이후로 수면내시경을 할까 그냥 할까 고민하는 환자가 있으면 자신있게 말해줍니다.

"왠만하면 수면으로 하세요. 저 그냥 했다가 죽는줄 알았다구요" (그래야 의사도 살고 환자도 삽니다.)^^

제가 미뤄놨던 내시경 경험담을 급하게 써서 올리는 이유는 바로 오늘 오전 검사한 환자때문입니다. 55년생이니 한참인 나이인데 일생을 처음으로 내시경을 했는데 아주 거대한 위암이 발견되었습니다. 검사하는 내내 화도 나고 우울하더군요. 보험공단 검사만이라도 정기적으로 했어도 이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이 사람은 아주 운이 좋으면 암을 모두 제거하고 (물론 위를 모두 절제해야겠지요) 재발없이 살수도 있겠지만.....  제가 오죽 마음이 아팠으면 내시경 끝나고 신경안정제를 좀 더 줘서 잠을 더 오래 푹 자게 해줬습니까?  오늘 이후로는 편하게 잠들날이 없을 테니까요.

오른쪽 반 전체가 모두 암입니다. 너무 커서 한장에 다 찍히지도 않아요. 거의 위 전체를 차지하니까요.

그리고 아래의 3명의 내시경 소견은 아주 일찍 발견된 조기위암 또는 미소위암 소견입니다.(얼핏 지나치면 전문의들도 놓치기 쉽습니다.) 이런 경우는 위절제를 안하고 위점막만 절제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엄청난 차이죠. 대부분의 환자들은 매년 내시경을 반복하다가 아주 작은 위암이 발견된 경우고 물론 가끔은 처음 내시경에서 조기위암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죠.


























여기서 내시경 수가나 조직검사 수가, 이런 이야기는 하고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때 맞춰 정기 검진이라도 열심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위내시경은 40세 이후 1년이나 2년에 한번(위험 요소가 있는 사람은 1년에 한번), 대장내시경은 3년이나 4년에 한번씩만 잘 받으면 최소한 소화관의 암으로 죽기는 상당히 어려울 테니까요.



About this entry


싱긋이 웃다.

하는 일이 좁은 점방에 매여있는 일이라 하루종일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거나 내시경실에서 내시경을 하면서 보냅니다. 체질적으로 오래앉아 있는 걸 싫어하는 지라 좀 바빠도 내시경을 하는게 맘이 편해서 내시경이 없는 날은 좀이 쑤시지요. 녹차를 많이 마셔서 화장실에 자주 가야하기 때문에 내시경이 있어야 자연스레 물도 버릴수 있고...^^


내시경을 할 때 대부분 수면으로 하기 때문에 내시경을 하면서 조무사들과 왕수다를 떱니다.(뭐 엄숙한 분위기에서 내시경 안하냐고 따지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가끔 수면임에도 기억하는 분들이 계셔서 ...ㅠ.ㅠ) 어제는 직원 하나가 이럽니다. (고등학교때 연애하다 바로 임신해서 결혼한 직원. 시골이라 흔한 케이스죠. 나름 애엄마 티 안내려고 노력합니다.^^)



"원장님은 젊은 여자만 보시면 절로 웃음이 나오시나봐요?"

"뭔소리야?"

"참! 이런거 보면 사모님이 불쌍하지."

"아니 아침부터 생사람 잡냐?"

(환자분! 지금부터 침 삼키지 마시고.... 트름 참으세요. : 수면내시경이지만 이런 대사가 들어갑니다.^^)

"어제 원장님이 내시경끝내고 가시는데 웃으시길래 절보고 웃는줄 알았더니 뒤에 있던 제약회사 직원보고 그러시더군요.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럼 처녀가 있는데 유부녀보고 웃으랴?"

직원2 : "아! 그 얼굴 까무잡잡하고 코수술한 그 여자? 눈웃음 엄청나더라니... 원장님은 넘어가시면 안돼요?"

"넘어가긴 뭐가 넘어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조직검사나 준비해!"

직원 1,2 : "그 직원 담에 오면 원장님 바쁘다고 핑계 대야지!"

"맨날 할머니만 보다가 가뭄에 콩나듯이 오는 젊은 여자마저 못보면 병난다. 예쁜 여자 보고도 고개가 안돌아가 가면 인생 접을 준비해야지!, 니덜 신랑도 다들 그럴 것이니 괜히 집에 가서 바가지나 긁지 말어. 알았지?"


이러면서 세월 보내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계절에 민감해져서 봄이 더디게 오는 거 같습니다. 어서어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봄바람난 여자들 구경하고 싶군요. 오늘은 장날이니 시장에 나가 순대국밥에 소주한잔 먹고 묘목이나 구경하러 나가고 싶으나... ^^


About this entry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스티브 잡스가 2005년에 스탠포드 졸업식 축사를 했던 내용.

성공한 사업가의 연설이라기 보다는 삶의 고갱이를 들여다본 깊은 눈을 가진 형님의 다정한 충고 같은 연설문.


원문은 : http://news-service.stanford.edu/news/2005/june15/jobs-061505.html


서론

스탠포드와 같은 세계 명문대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 설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지요. 고백하자면 이렇게 가까이서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는 처음입니다. 오늘 저는 졸업생 여러분께 제 인생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더도 말고 딱 세가지 이야기만 하지요.

첫째 이야기

그 첫번째는 점 잇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리드 칼리지2)를 한학기만에 그만 뒀어요. 하지만 그후 일년반 동안 청강 생활을 했어요. 왜 제가 대학을 그만 뒀을까요?

그 이유는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미혼모 대학원생이었던 생모는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심 했습니다. 어머니는 대졸자 양부모를 강력히 원했고, 제 미래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집안에 입양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제가 태어났을 때 이 집안은 사실은 딸을 원했다면서 입양을 거절했습니다. 그 당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었던 양부모님은 한밤 중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어요. “예정에 없던 사내 아이가 나왔는데 받으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양부모님은 “좋습니다”로 대답했지요. 친어머님은 나중에 양아버지는 고졸 중퇴에, 양어머니는 대학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입양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어요. 몇 달 후에 양부모님이 제가 크면 대학에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친어머님은 수락하셨죠.

그로부터 17년후에 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택했습니다. 일반 근로자였던 양부모님이 저축한 모든 돈이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 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까먹고 있었죠.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고, 모든 일이 잘 될거라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꽤 두려웠지만, 돌아 보면, 제가 인생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퇴를 하고 나니, 관심없었던 필수과목 대신 듣고 싶었던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낭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기숙사에 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 거실에서 잠을 잤고, 콜라 빈병을 모아 재활용센터에 갖다 주고 병당 5센트를 받아서 먹을 것을 샀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3)의 일요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식사는 정말로 좋았습니다. 제 호기심과 직감으로 얻는 대부분의 경험은 이후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만큼 소중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예를 한가지 들어 보지요.

그당시 리드 칼리지에서는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교정 곳곳의 포스터, 서랍의 레이블 마다 아름다운 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퇴를 했으니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서체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세리프와 산 세리프 서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자모의 결합에 따라서 자간을 달리 둠으로써 훌륭한 서체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역사적으로 유명했으며, 과학은 따라 갈 수 없는 섬세한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매료되었죠.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인가 하는 한 가닥 희망 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후,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의미가 와 닿았습니다. 매킨토시와 접목을 시켰을 때, 미려한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했으니까요. 제가 만약에 그때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다중 서체나 비례적으로 자간을 조정하는 글꼴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가 맥을 그대로 따라 했으니까, 매킨토시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퍼스널 컴퓨터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겠죠.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테니, 퍼스널 컴퓨터는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인쇄술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에는 이런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 보았을 때, 모든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미래의 점들을 이어 그림을 볼 수는 없어요. 과거의 점들은 이어 보면 그림이 보이죠. 그러므로 이런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건 간에 믿어야 합니다. 이런 인생관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종국에는 인생까지 변화시켰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운 좋게도 저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일찍 찾았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에 워즈4)와 같이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10년 안에 애플은 사천 명 이상의 직원을 가진 20억불 짜리 회사로 컸습니다. 창사 이래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전년도에 출시했고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고를 당했죠. 스스로 창업한 회사로부터 어떻게 해고를 당할 수 있느냐구요? 애플의 규모가 점점 커감에 따라 저와 함께 회사를 관리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을 영입했고, 한 해 정도는 잘 굴러 갔습니다. 그러다가 회사의 장래에 관한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불화로 번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회사의 이사진들은 그 사람 편을 들었죠. 그래서 나이 서른에 쫓겨 났던 겁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말입니다. 제 인생의 초점이 사라졌고, 그것은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 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마치 제쪽으로 오던 바톤을 놓친 것처럼 한 세대 전의 기업가들을 볼 면목이 없었어요. 데이빗 패커드5)와 밥 노이스6)를 만났고 볼쌍 사나운 제 실패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아주 공공연한 실패작이라 차라리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을 칠까 하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 사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축출당했지만, 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 당한 사건은 돌아 보면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최고의 사건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무거움을 벗고, 확신은 전보다 줄었지만, 다시 처음 시작한다는 가벼움으로 임했습니다.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며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접어 들게 되었던 거죠.

그로부터 5년간, 넥스트7), 그리고 픽사8)를 창업했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자와 사랑에 빠졌죠.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으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9)했고, 저는 애플로 돌아 왔고, 넥스트에서 개발했던 기술은 현재 애플 르네상스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로렌스와 저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죠.

애플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합니다. 그것은 지독하게 입에 쓴 약이었지만, 그 환자는 그 약이 필요했나 봅니다. 때로 삶은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칩니다. 신념을 버리지 마세요. 제가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임을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이 일도 그런거죠. 자신이 하는 일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진정한 만족을 얻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훌륭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 보세요.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마세요. 가슴으로 알 수 있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찾았으면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인지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처럼,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찾을 때까지 계속 탐색을 하십시오.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열 일곱 살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지막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옳은 길로 들어 설 것이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저는 그로부터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대답이 계속 나온다면, 무엇인가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생이 마지막 순간이 언제 찾아 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제가 인생의 중대 결정을 내릴 때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심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다 도망치고,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은 잃어버릴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입니다. 당신은 이미 벌거 벗은 상태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일년 전쯤에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30반에 씨티 촬영을 했는데, 췌장에 종양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 췌장이 뭔지도 몰랐어요. 의사들은 이 암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며, 길어야 석달에서 여섯달이라고 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에 가서 주변을 정돈하라고 하더군요. 환자에게 죽을 채비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하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를 불과 몇 달 안에 다 하라는 것입니다. 매사를 잘 마무리해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을 가능한한 줄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목구멍으로 통해서 위장을 거쳐 장까지 내시경을 넣고, 췌장에 바늘을 꽂아서 종양에서 세포를 채취했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나중에 집사람이 얘기해주더군요. 현미경으로 조직세포를 본 결과 아주 드문 췌장암의 한 종류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구요. 의사들이 눈물을 글썽거렸죠.

그때만큼 죽음의 문전에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 몇 십 년동안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겪고 나니, 죽음 자체가 유용할 수 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던 시절보다 좀 더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사람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어느 누구나 도달하는 목적지입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과도 같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죽음은 ‘삶’의 변화물질입니다 옛것을 치우고, 새것을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지금 그 ‘새것’은 바로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여러분도 ‘옛것’이 되고, 치워지겠죠. 지나치게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결어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낭비를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의 생각이 빚어낸 결과가 구속하는 삶, 즉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의 목소리가 다른 이의 의견이 내는 소음에 익사당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있게 당신의 가슴과 직감이 하는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이 진정 무엇이 되고자 하는 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전체 지구 목록10)이라는 굉장한 책이 있었는데 우리 세대 바이블 중 하나였죠. 지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맨로 파크11)에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12)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이 책에 자신만의 시적 영감을 불어 넣었죠. 1960년 후반이었는데 퍼스널 컴퓨터나 탁상 출판이 출현하기 전이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었습니다. 구글이 존재하기 35년전에 있었던, 책으로 된 구글 같은 것이었죠.

스튜어트과 그 팀은 전체 지구 목록의 몇가지 증보판을 냈고, 수명을 다했을 무렵, 최종판을 출판했습니다. 1970년 중반이었고, 그때 저는 지금의 여러분 나이였습니다. 최종판 뒷쪽 커버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붙어 있었어요. 모험심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그 사진 속 시골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죠.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습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그리고 늘 제 자신이 그러하기를 소망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 출발을 위해 졸업을 하고, 저는 여러분께 똑같은 소망을 보냅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역주

1) 이전에 번역한 적이 있는데 오류가 있던 부분을 일부 수정하고 정리했다.
2) Reed College
3) the Hare Krishna:힌두교 계열
4) Woz: Steve Wozniak의 애칭.
5) David Packard: 휴렛 패커드의 공동 창업자.
6) Bob Noyce: 인텔의 공동 창업자.
7) NeXT: 넥스트 컴퓨터는 시대를 앞서가는 기술력은 인정 받았으나 대중화에는 실패한다.
8) Pixar Animation Studios: 사실 스티브 잡스가 인수한 것이지 창업을 한 것은 아니다.
9) 당시 BeOS 역시 인수 대상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파워게임에서 밀렸다.
10) The Whole Earth Catalog: 카탈로그 형식을 취했고 1968년에서 1972년 동안 일년에 두번 발행했다. 이 잡지는 독자 스스로가 영감을 발견하고 자신의 환경을 결정 짓는 사고의 도구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 독자들의 모험심을 장려했다.
11) Menlo Park
12) Stewart Brand



About this entry



<< Previous : [1] :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 [23] : Next >>

Calendar

<<   2025/12   >>
S M T W T F 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