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불꽃이 재키의 손바닥에 가려 주변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재키의 태연한 표정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확 풍겼다. 재키는 자기 살을 태우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런 것 같아. 고통이야. 그러나 그 사랑의 정체가 고통이라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아냐. 세상에는 그런 사랑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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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책이다.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 첫머리에,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 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대목이 바로 떠올랐다.

도대체, 네가 사는 이유가 뭐니? 라고 묻는 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com)이라는 자살싸이트 창시자 정세영. 뛰어나 미모와 지성으로 친구들을 유혹하고 5년뒤에 친구들이 인생의 최고점에 섰을때 자살하도록 조정한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뿐이다.

어쩌나 운좋게 태어나 단물을 빨아먹으며 호의호식하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알량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누구는 88만원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토익책을 집어던지고 짱돌을 들라했고 죽어라 노력해서 잘난 시스템에 들어가봤자 노예가 될뿐이고 가난뱅이인건 달라지지 않는다고 밖에서 유쾌하게 시스템을 흔들어보자고 말하는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 마르크스도 체도 마오도 레닌도 시큰둥하고 진부하다며 오직 가능한 저항은 자살이라고 그녀는 속삭인다.

도대체 인간을 맹목적적으로 생존하게 만드는 생존본능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는 삶의 비밀을 알아차리고도 꾸역꾸역 하루를 저지르며 살아내게 만드는 이 힘의 정체가 과연 무얼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고 싶지는 않다. 알게되는 순간 나도 와이두유리브닷컴의 지지자가 되고 말거 같다.

과연 적그리스도는 디스이스리즌닷컴(thisisreasion.com)을 구축할 수 있을까?

매혹적이며 참혹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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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원제 : Annam 安南)

(줄거리)
일단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18세기 베트남을 향하여 배를 타고 떠난다. 마음 착하고 신앙심 깊은 이 여자 남자들은 미지의 땅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들은 일 년이 넘게 걸려서 비로소 사이공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서 그들은 남쪽 지방의 농사꾼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그런데 한편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난다. 프랑스는 동방으로 떠난 선교사들을 까맣게 잊고 산다. 선교사들은 그동안 모든 것을 버렸고 모든 것을 다시 배웠다. 베트남은 특유의 습기와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그들을 모두 딴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살고 죽는다. 그들은 하느님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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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은 복음서를 경청했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하여 그들의 옛 신들을 믿었다. 베트남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은 채 다 간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영원속에서 한데 뒤섞였다. 존재들은 논 위를 불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지나갔다. 논에 심어놓은 벼가 그 즐거운 푸른색으로 허리를 굽혔다.


지아라이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이 가득 깃들어 있는 어떤 세계를 믿었다. 만물 속에 신이 있었다. 저마다의 존재는 비록 생명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씩의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이 베트남 사람들은 얌전하고 조용했다. 참을성 있는 그들은 표지 하나하나 속에 깃든 우주를 섬겼다. 달이나 바람처럼 비가 그들에게 말을 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머나먼 전설들이이 살아 숨쉬는 한 권의 책을 소개했다. 전설들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신들은 믿기 어려운 것이면서도 마음에서 가까웠다. 신들은 잎사귀 하나하나를 떨게 했다. 여러 가지 표지들이 그 베일을 벗고 나타나는 어떤 여름밤이면 마을은 행복한 신음 소리로 수런거렸다. 남자와 여자가 우주에 하나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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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닌 수녀는 베트남 중부 산간지역의 지안라이족이 사는 곳에 이르른다. 그들은 기나긴 여행끝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두 남녀의 모습으로 끝맺어진다.


그들은 벗거벗은 채 서로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젊은 여자의 젖가슴 위에 손을 얹어놓고 있었다. 여자의 배는 땀과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했던 것이다. 깊은 정적만이 깃들어 있었다.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였다. 육체를 사로 나누는 법이 없이 눈이 매섭고 말씨가 공격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찾아내게 될 줄로 기대했던 것이다. 성직자들의 태연하기만 한 모습과 창백함에 군인들은 감동핬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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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문체에 여백이 많은 짧은 소설. 하지만 이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스물한살의 청년이 썼단다.
아! 정말 놀라운 처녀작이다.

바람이 불면 훌훌 날아가 버린다는 안남미에서나 알고 있던 안남이라는 나라. 남쪽의 평안한 이곳을 얼마나 많은 왕조와 서양의 나라들이 침략했는가.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논을 일구고 사랑을 하고 풍경을 만들어 갔다. 결국엔 중국도 프랑스도 미국도 다 녹아들고 말았다. 네이팜탄과 에이젼트 오렌지로 범벅을 만들어도 빼싹마른 그들은 땅굴속에서 끝내 이기고야 말았다.

그들이 자본에도 꼭 이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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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근원

박아무개라는 방통위 위원이 현재 황당하게 일어나고 있는 검열에 항의하기위해 올린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에 대해 '여자 음부 그림'을 올렸다고 대서특필하고 나섰다.

참 한심하기도 하다. 이 그림은 미성년자가 둘이나 있는 우리집에서도 책표지에 당당히 나와있으며 아이들과 이 그림을 보며 정말 대단한 발상이야 하면서 같이 감탄하기도 한다.

제발! 니들도 다 씹해서 거기서 나왔거든? 뭐 어떻다고 그러니?
아, 이러니 무서운 테러범이 부러워 하는 나라가 되는 거라고. 꼰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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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6일 파리 오르셰 미술관은 19세기 사실주의 거장인 쿠르베의 걸작 을 미술관의 정식 소장품으로 진열하는 역사적인 행사를 가졌다. 세로 55, 가로 46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작은 그림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주제로 회화사상 악명을 떨쳤다

원래 제목인 '세상의 근원'대신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X로 불려졌던 그림. 이 위험한 그림은 1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의 격렬한 비난과 공격을 피해 음지식물처럼 그늘에 숨어 지냈고, 오직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덮개 그림으로 철저히 위장한 채 자신을 보호했다. 이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오르세 미술관에 걸리기까지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역정은,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미술품의 고초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해준다

때는 1866년 숨 가쁜 정세의 변화로 몸살을 앓는 격동기의 파리, 엄청난 부호이지 희대의 방탕아로 숱한 염문을 뿌린 터키 대사 카릴 베이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쿠르베에게 은밀한 주문을 한다.자신의 음탕하고 방종한 취향을 만족시킬 지극히 외설적인 그림을 부탁한 것이다

착취당하고 박해받는 서민들의 수호자로 부르주아 계급의 기만과 위선에 맞서 열정적으로 싸웠던 혁명아 쿠르베는 과격하고 타협을 모르는 기질답게 회화의 역사를 뿌리째 뒤엎는 충격적인 음화를 제작한다. 아름다운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를 과감히 잘라내고 여성의 생식기만을 화면 가득 등장시킨 파격적인 구도를 선택한 것이다

수천년 이상 지속된 금기를 대담하게 깨부수고 냉정한 시선으로 인류의 출생지를 묘사한 혁명적인 그림은 곧 카릴 베이가 아끼는 소장품이 되었다. 대단한 미술품 수집가이며 애호가인 카릴 베이는 그림을 비밀 진열실에 몰래 숨겨 두엇다. 극소수의 가까운 사람들만이 고전주의의 대가인 앵그르의 걸작 옆에 나란히 걸린 비밀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 뒤 카릴 베이의 품을 떠난 그림은 헝가리. 독일. 소련으로 거처를 옮기며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55년 세계적인 성의학자이며 철학자인 자크 라캉의 소유가 된 다음에야 겨우 안식을 취하게 된다. 자크 라캉은 그림의 안전을 우려한 나머지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마송에게 덮개 그림을 주문해서 위장을 했다. (쿠르베 자신도 비밀 그림을 가리기 위해 이라는 풍경화를 덮개그림으로 그렸음) 풍경과 여성의 하체를 교묘하게 결합한 마송의 가리개 그림 덕분에 은 파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상속세 대신 국가에 기증될 때까지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명작을 보존하기 위한 이 같은 소장가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화는 반드시 그 시대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며 통렬하게 기성 체제의 위선을 비판했던 쿠르베. 그의 강한 저항 정신이 그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작품을 탄생시킨 근원이 된 것이다.


- 이명옥 저 사비나의 에로틱 갤러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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