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여름 이야기(2)
다음날 아침. 빨래가 안말랐다고 제수씨가 건조기로 잔차옷을 돌리고 있는데 여지없이 비가 계속 옵니다. 부슬부슬....ㅠ.ㅠ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고 출발을 하는데 지관이를 보내는 은영이의 눈길이 참 측은한 눈빛입니다.(휴우~~ 그래! 나는 참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구나. 사랑해요! 엄마-아빠!) 고맙다 친구야! 담에는 좀 보통의 방법으로 속초에 놀러올께. 매번 미안하다.
뻣뻣한 관절을 억지로 움직이며 꾸역꾸역 출발을 하는데 정말 죽을 맛입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속초 시내를 통과하여 7번 국도에 들어섭니다. 잠시 뒤를 돌아 지관이가 잘 따라오나 뒤돌아 보는데, 아이구! 맙소사! 지관이가 검정 흙탕물을 완전히 뒤집어 썼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튀어도 깨끗하기라도 한데 부슬부슬 오는 비에 도로가 젖어 있으니 완전 흙투성이가 되어있었습니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지관아! 이게 뭐야? 흙탕물 엄청 튄다고 말하던지 좀 떨어져서 오지 그랬어?"
"시내를 통과하느라 정신도 없었고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뀔까봐 그럴 수가 없었어요."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저는 그저 아이가 길을 잘 모르니 내가 앞장서서 길을 알려주고 위험한 구간을 먼저 길을 터준다는 생각만으로 앞장을 섰고 그 잘난 앞가림 생색 때문에 뒤에 있는 아이는 구정물을 뒤집어 쓰고 있었던 겁니다. 속초 시내가 복잡하면 얼마나 복잡할 것이며 길을 잃어봐야 7번 국도로 들어서기만 하는데 뭐가 그렇게 못미덥고 마음이 급해서 그저 부모의 결정에 뒤를 따르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아이를 만들었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더군요. 저는 좋은 마음으로 앞장을 섰지만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도 항상 좋지만은 않았던 거지요. 그래요. 세상에서 선의에 의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결국에는 그게 폭력이 되고 오히려 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 걸 종종 보면서도 설마 내가 그럴리가 없다는 자기확신이 이런 풍경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정도면 정말 괜찮은 부모라는 자신감이 문제의 시작이었어요. 한심한 꼰대같으니....)
아이의 미래가 불안하고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도대체 혼자서는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에는 내가 편하고자(불안감을 덜어보려고) 잘난체를 하면서 별것도 아닌 길잡이를 자처하며 뒤따르게 하고 있었던거였습니다. 좀 불안하고 비틀거리고 종종 길을 잃어도 결국에는 자신의 본모습을 찾을 것이고 자기의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텐데 그걸 못기다리고 조바심을 내기만 했습니다. 조금만 더 느긋하게 뒤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제게 있었으면 좀 더 나은 길잡이가 되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시부터 이미 땡볕이고 9시쯤 지나자 오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덥습니다. 비가 지겨웠는데 막상 땡볕이 내려쬐니 죽을 맛입니다. 원래 계획은 속초에서 200km를 달리면 삼척지나 울진까지 가야하는데 이미 모든 계획은 변경되었고 삼척까지라도 가면 다행이겠다 싶었습니다.
하조대
그늘만 있으면 어디든 쉬어갑니다. 주로 버스 정류장. 틈만나면 웹툰 삼매경에 빠지는 지관이.
속초부터 강릉까지의 7번 국도 구간은 정말 힘들고 재미없었습니다. 중간에 하조대에 들러서 사진찍고(군사시설이 대부분이고 정자도 없고 조그만 등대가 썰렁하게 있습니다) 정처 없이 달리다가 더위에 집중력이 떨어진 지관이가 갓길에서 턱에 걸려 낙차 사고가 발생! 깜짝 놀랐는데 다행스럽게도 도로에 차가 뜸해서 후다닥 일어나 살펴보니 무릎이 좀 까지고 발목에 상처가 생겨서 피가 흐르더군요. 갓길에서 땡볕을 받으며 물통의 물로 씻고 소독약 바르고 응급처치를 끝내고 나니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정말 잘하는 짓일까? 이러다 큰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어떻하지? 지금이라도 경포대 해수욕장에 가서 방잡고 비키니나 보면서 맥주나 마시다가 고속버스타고 서울로 돌아갈까?' 등등 수만가지 생각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복잡한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고맙게도 지관이가 "아빠! 제가 턱 넘어설때 싸이클 바퀴는 가늘고 잘 미끄러지니까 가능한 직각으로 넘어서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몸으로 배웠으니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고고씽!" 하는 겁니다.
이후로 저는 앞장을 서다가도 잘 따라오는지 자꾸 뒤를 돌아봐야 했고 틈틈이 사진을 찍는 다는 핑계로 멈춰서서 기다리기도 했고 일부러 지관이를 앞장을 세우기도 하면서 모든 걸 챙겨야 했습니다. 갑자기 불안해졌던 거지요. 그랬더니 나중에는 하도 목을 돌려서 목과 어깨까지 근육통이 생기고 정신적으로 엄청 피로해졌습니다. (아! 이래서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조금이나 알겠더군요. 이대목에서 싱글맘, 싱글파 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컨디션이 너무 떨어져서 막국수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삼척에서 유명한 '부일막국수'에서 먹는게 목표였는데 이제는 모든 계획이 단순해집니다. 주문진 근처 막국수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나니 가까운 곳에 커피로스터로 유명한 박이추선생이 하는 '보헤미안'이 근처에 있다는 게 기억나서 일부러 지하차도로 유턴까지 해서 찾아갔건만.... 월요일은 휴무랍니다. 보헤미안 하우스 드립커피에 딸려나오는 토스트가 먹고 싶었던 지관이는 망연자실... 잠깐 누웠다가겠답니다. ㅠ.ㅠ
보헤미안. 우리나라 커피 로스터 1세대인 박이추선생이 운영하는 곳. 강하게 볶는 커피가 특색이고 사모님하고 펜션, 커피숍, 로스팅을 하는 집입니다. 이미 유명한 곳이지만 혹시 잘 모르시는 분은 주문진 근처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꼭 가셔서 진한 커피맛을 보시길.
강릉을 지나는데 네다섯명의 젊은이들이 주유소 앞에서 희안한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유소 호객꾼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나름 열심히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었습니다. 버스휴게소에서 파워젤을 빨아먹으면 이 친구들을 히히덕 거리면서 구경을 하고 나니 힘이 좀 나더군요. (한 청년의 손동작이 꼭 DDR 동작과 비슷해서 둘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차를 얻어타고 동해 망상 해수욕장까지 간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쉽지 않아보였습니다. 아마도 우리 자전거가 먼저 지나갔을 겁니다.
히치하이킹하는 청년들. 젊었을때는 이런 걸 해도 귀엽죠. 늙어서도 이래야 하면 슬플거고.
강릉을 지나니 7번국도가 갓길도 넓어지고 한가해 지더군요. 모두가 새로 뚫린 강릉 - 동해 고속도로 덕분인데 새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옛길이 명목상 고속도로 였습니다. 잠깐뿐이었지만 여행 기간중 거의 유일하게 갓길에서 나란히 수다떨며 달릴 수 있었습니다. 강릉에서 동해, 삼척으로 가는 길은 예전에 이쪽에서 봉직의 생활 할 때 엄청나게 많이 다녔던 길이었습니다. (물론 차로, 같은 길을 자전거로 달리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일.) 그때는 대관령 터널이 뚫리기 전이라 서울에 다녀오려면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구불구불한 대관령을 넘고도 또다시 한시간 넘게 달려야 삼척에 갈 수 있었습니다. 대충 기억에 터널이 두개 있었고 언덕이 상당히 많았다는게 어렴풋이 떠올랐으나 무조건 달렸습니다.
갓길이 넓죠? 가끔 만나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여행자인 도보 여행자.(두번째가 자전거^^) 배낭에 옷걸이가 걸려있네요.
터널 통과하는 모습.
흥은택님이 쓴 글에 보면 자전거 도로주행의 급수가 있는데 1. 다리 건너기 2. 고가도로 건너기 3. 터널 통과 라고 했는데 전적으로 그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터널은 일단 갓길이 없거나 좁고 엄청난 소음과 매연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최고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터널을 통과 할 때는 항상 지관이가 앞에 갑니다.^^ 이번 여행에서 엄청난 수의 터널을 통과해서 고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만.... 아직도 터널 통과는 두렵기만 합니다.
차가 많지 않아서 오랜만에 잔뜩 긴장했던 신경을 누그려뜨리면서 라이딩을 했지만 강릉 동해 구간도 언덕의 연속이라 참 힘들었습니다. 옥계에 도착하여 다리밑에서 옥수수와 냉커피를 마시며 잠시쉬는데 지관이가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문자를 못보내겠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보니 손에 힘이 빠져서 기어변속을 잘 못하는 일이.....
멀리 보이는 바닷가가 동해 '망상'해수욕장입니다. 동해영동병원에서 근무할때 여름이면 비키니 구경하러 자주 갔었죠. 떠나는 해 여름에는 아이들하고 텐트치고 놀기도 했는데... 해수욕장 앞을 지나는데 엄청난 비키니 물결에 잠시 정신이 혼미. 두 사내는 눈을 두리번 거리며 안구정화를 하고서 애써 떨어지지 않는 페달을 돌려서 삼척으로 달렸습니다.
동해에서 삼척은 아주 가까운 10km. 그러나 이 길도 업-다운의 연속입니다. 이름하여 낙타등 지형. 이제 마지막 고개만 넘어서면 삼척인데.... 지관이가 부릅니다. 아빠! 펑크! 그래 왜 안오나 했더니 펑신 영접이군요. 출발전에 모든 튜브를 새걸로 바꾸고 펑크방지테잎도 넣었건만.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펑크는 이번뿐이었습니다.
마지막 고개를 넘어 삼척에 들어서니 마치 고향에 온것만 같습니다. 10여년 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거리를 달려 자전거샵에 가서 속초에 장갑을 흘리고 와서 한켤레 샀더니 친절한 사장님이 자전거 세차까지 시키주셨습니다.
숙소 잡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저녁먹고 그대로 잠자고 싶었으나 '주륜야독'을 실천하고자 단어를 같이 외우려고 복사해온 단어장을 꺼냈더니 잉크젯 잉크가 다 번져있더군요. 역시 그냥 집어치라는 계시라 생각하고 꿈나라로 고고싱!!!
@ 여행 둘째날 결산 (8월 3일) : 강릉에서 삼척까지 120km 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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