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여름 이야기(1)
방학시작 할 때 짜는 생활계획표는 구할이 뻥이라 해도 해도 이번 휴가 계획은 너무나 황당했던 것으로 판명났습니다. 하루에 200km씩 자전거로 움직여서 서울에서 속초를 거쳐 7번 국도를 타고 삼척, 울진, 영덕, 포항, 경주를 지나 부산까지 가서 다시 대구, 청주를 거쳐 서울 돌아온다는 1000km 대장정을 5일에 끝내겠다는.... 아주 깜찍한 계획이었으니.... 선선한 가을도 아니고 서포트 카가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꼴랑 남자둘이서 폭염주의보가 내린 여름의 한중간에 보급차량도 없이 모든 짐을 등에 지고 이런 계획을 짠 사람은 분명히 경험을 하다말아서 '내가 해봤더니'를 연발하며 터무니없는 목표를 세우고 몰아치는 성과주의 꼰대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꼰대도 아무 막무가내 인간만은 아니어서 나름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었으니(사실 이런 자가 더 무서워요) 평소 그의 자전거 출퇴근 하는 거리가 90km인데 3시간 30분 정도 걸리니까(아침 6시 30분에 출발해서 8시 도착, 퇴근은 저녁 6시에 출발해서 8시 도착) 나머지 110km를 일과시간에 쉬엄쉬엄 가면 되지 않을까하는 나름 평범한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자출할 때는 맨몸으로 가능한 가벼운 자전거로 익숙한 길을 달리지만 처음가는 여행길을 그렇지 못할 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거죠. 얼마나 자신감에 넘쳤냐하면 이 여행의 성공여부에 10만원 내기를 걸었습니다.(고2인 재관이와 ....같이 여행을 못가서 미안했지만 내심 당사자는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여행 계획을 이야기 했을 때 제일 의외인 것은 너무나도 순순히 함께 가겠다고 한 지관이였습니다. 한참 사춘기인 중딩이 꼰대와 자전거를 타고 4박5일을 달린다. 그 과정에는 협박도 없었고 당근도 없었죠.(설마 그런걸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을겁니다.) 나름 뭔가 기대하는 것이 분명 있었겠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한 여름에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4박5일의 시간을 보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나게 부러워합니다. 역시나 이런 여행은 대부분 자식가진자의 로망이었을까요? (아닌가? 나만 착각?)
준비물은 별게 없습니다. 자전거가 무거운 지관이는 물배낭만 메고 옷은 입은 옷에 여벌옷 1벌, 양말도 한켤레, 라이딩 도중에 먹을 이동식(파워바,파워젤), 똑딱이 카메라 2대, 필름똑딱이 카메라와 흑백필름 5통을 가져갔는데 1컷도 못찍었습니다.(너무 힘들어서 카메라를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ㅠ.ㅠ) 옷은 자전거탈 때 입는 쫄바지(Bib shorts라고 하는데 레스링 경기복을 상상하면 됩니다.)만 가지고 갔고 Bib 안에는 피부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노팬티 이기때문에 숙소에서는 홀딱벗고 지내다 저녁먹으러 나갈때는 쫄바지에 져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이게 생각보다 아주 웃긴 풍경입니다.^^ (전라사진 나중 공개!!!)
다만 이렇게 젤로 더운 폭염 주의보의보가 내린 한여름에 자전거를 탄다는 것이 과연 제정신인가? 라고 질문하는 분을 위해 답을 하면 1. 충분한 수분과 전해질을 공급하고 2. 적절한 자외선 차단 준비를 하면 큰 문제 없이 가능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중에서 최고의 땀샘을 보유하고 있어 수분 증발을 통한 기화열로 아주 효과적으로 체온을 조절 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는 달리기에 비해서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더더욱 효과적으로 땀을 증발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땀으로 소실 되는 수분외에 전해질을 공급하지 않고 맹물만 마시면 체내 전해질이 희석되어 '물중독증'을 일으킬 수 있으니 땀을 많이 흘릴 때는 전해질이 들어있는 음료수나 간식을 적절히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막무가내 무식한 계획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말씀!!)
8월 2일 월요일 아침 6시 기상. 그런데 젠장알 비가 오고 있습니다. 밤새 시끄러운 비소리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속초까지 최소 200km를 가야하는데 비까지 오니 걱정스럽습니다. 양평까지 전철 중앙선을 타고 가서 160km만 타고 갈까하는 얄팍한 생각도 들었으나 출근시간에 자전거를 들고 전철에 타기도 미안하고 자전거를 타고 동쪽으로 서울을 벗어나 보지 못해서 그 경험을 포기하기도 싫어서 꾸물거리다 7시 30분에 출발. 다행스럽게도 집을 나설때는 비가 그쳐 가뜩이나 심난한 김여사에게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출발기념사진. 지관이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것 같군요.
비올때 헬멧안에 쓰는 모자입니다. 투명한 챙이 있어서 시야를 확보해 주면서 비물이 바로 눈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주고 뒤에는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천이 있어 흙탕물이 머리에 적시지 않게 해줍니다. 펄이즈미 제품이고 이번에 아주 요긴하게 썼습니다. 작년에 제주도 라이딩때 배운 경험입니다.
잠실을 지나
하남을 지나니 아예 무인지경입니다.
팔당대교를 건너니 바로 팔당댐입니다. 비는 계속.
양수대교 중간입니다. 두물머리라 경치가 좋을 텐데 비땜에 하나도 뵈는게 없네요.
속초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이런 4차선 도로의 갓길 주행입니다. 시끄럽고 재미없지만 나중에 개량된 7번국도를 달려보니 이정도 길은 아주 인간적인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양평 근처에 가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로 내립니다. 번개가 떨어지면 카본인 내 자전거 하고 알루미늄인 지관이 자전거하고 누구한테 먼저 번개가 떨어질까 등등 쓸데없는 생각을 억지로 하면서 애써 정신없이 달리는데 이제는 아예 배수로가 넘쳐 갓길은 폭포수가 되어 흐르고 도저히 라이딩이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어서 12시 30분에 해장국 집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완전 물에 빠진 생쥐꼴이라 남의 영업점에 들어서기가 참 미안했는데 고생한다고 친절하게 잘 해주시더군요.
따뜻한 국밥으로 몸을 녹이면서 계속 라이딩을 해야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지관! 계속 갈 수 있을까? 비가 장난 아닌데. 어떻하지? " 하고 물으니... 중딩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슨 섭섭한 말씀이세요? 당연히 계속 고고씽이지요! " 하네요. 속으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녀석이 아직 고생을 덜 했구나. 그래 좀 더 달려보자고 결심하고 빗속을 하염없이 달립니다. 그러다 중간에 펑크 때우던 4명의 대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이 형아들이 중딩한테 추월 당하니 많이 속상한가 봅니다. 나름 열심히 용을 써 보지만 막강 중딩을 당할 수 가 없군요.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고 달리다가 홍천에서 강릉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아쉽게도 헤어졌습니다.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면 참 많은 위안이 되던데.... 드디어 차차 비는 그쳤는데 인제 가까이 도착하니 170km를 달렸음에도 속초까지는 최소 40km 가 남았습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200km 라지만 이건 잠실에서 출발했을 때고 목동에서 잠실까지 20km가 추가 되었고 비가 온다고 꾸물거려서 출발시간도 40분 늦어서 이대로 계속 가면 최소한 2시간을 더 가야하는 데.... 이미 저녁 6시 30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시간!
앞쪽에 자전거 타고 가는 동지 발견!
이름모를 휴게소 화장실앞. 쪼끔 불쌍해 보이네요.^^
엄마! 아직 갈만해요. 히히
합강정휴게소에서 번지점프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속초를 포기하고 인제에서 자고 갈 건지 계속 달린 것인지 지관이 한테 물으니 또 정색을 하면서 계속 갈 수있고 다리도 가볍다고 합니다. 아니! 이녀석이 애비 몰래 산삼 뿌리를 먹었는지 힘이 넘치네요.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지관이 상태가 '러너스 하이'였습니다. 야간 라이딩은 안하려고 작정하고 왔지만 혹시나 몰라서 라이트도 준비했는데 그래도 다음날 일정도 있고 웬만하면 그만 달리고 싶었으나 자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계속 달려 인제터널 통과해서 번지점프대가 있는 합강정휴게소에 이르니 드디어(절대로 기다린거 아닙니다.^^) 지관이가 급격한 체력 저하로 GG를 외치고 맙니다. 이럴줄 알고 진즉이 속초 친구한테 이미 SOS를 쳐논 상태였으니....^^ 잠시 뒤 친구 차를 타고 속초집에 도착.
"아빠! 차가 이렇게 좋은 거였어요? 가만히 있어도 막 움직이는게 엄청 신기하네요. "
"그래도 네 다리로 175km를 8시간에 왔으니 차보다 자전거가 더 대단하지."
멀리서 친구가 온다고 진수성찬을 준비해 논 친구가족과 즐거운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삼척에서 살 때부터 10년지기 친구고 지관이하고는 유치원 동창생) 은영이(큰 딸네미)가 묻습니다.
"아저씨! 왜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세요?" - 이런 질문은 술꾼한테 왜 술을 먹느냐, 산에 가는 사람보고 왜 산에 가느냐는 것처럼 답이 없는 문제이지만 일반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한테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 나름 솔직한 대답이...
"음~~ 그러니까 ~~~ 여자들한테 멋있게 보이려고 그런 것 같아" - 철들고 나서 한 행동중에 구할은 그랬던 같은이 참 솔직한 대답입니다.
"헐~~~" (참 단순한 남자로구나.)
"어~~ 좀 이상한가? 그럼 맨날 같은 길로만 다니는 출퇴근 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같아. 일상성의 반복에서 벗어나고픈 자아의 몸부림이라고나할까?"
"헐~~~"(첫번째 답이 차라리 나아요. 그런데 지관이는 무슨 팔자가 드세서 저런 아비를 만났을꼬? ㅠ.ㅠ)
이때 친구가 한마디로 자르네요.
"닥치고 술이나 먹세!"
힘든 하루였지만 친구가 좋고 술이 좋아 11시가 넘도록 수다를 떨면서 술을 마셨습니다.(나중에 알고 보니 지관이는 한시가 넘도록 수다떨고 노느라 안잤다네요)
@ 결산 : 서울 목동에서 인제 합강정 휴게소까지 8시간 주행에 175km.
늘씬 미녀가 된 소꿉친구 은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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